난초 향기를 품은

민족 문화의 수호자

가람 이병기


가람 이병기 선생의 발자취들

전북특별자치도 곳곳에 가람 이병기 선생의 흔적이 스며 있는데요, 그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오월,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그의 작품 ‘별’을 흥얼거리며, 우선, 전주 다가공원에 있는 가람 시비, 그리고 가람이 잠시 머물렀다는 한옥마을 양사재를 둘러볼까 합니다.

난초처럼 살며, 단 한편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았던 그의 뒷모습은 뭉클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내 부정한 이병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죠.

또한, 호남의 관문인 ‘여산 휴게소’에도 가람 선생의 흔적이 있는데요, 그의 고향 여산의 ‘여산초등학교’를 재직했던 인연으로 ‘여산초등학교 교가’도 직접 작사했다죠,

이러한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고, 오늘 여행의 하이라이트 가람문학관과 가람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를 방문해 볼까 합니다. 현대 시조의 개척자요, 한글과 우리 국문학의 대들보 가람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하루, 두근두근 우리 함께 동화되어 볼까요?


다가공원의 가람 시비

참궁로(參宮路)를 따라 오른 다가산 정상입니다. ‘참궁로’는 다가공원을 오르는 길을 칭하는 말로 ‘눈물로 참배를 가는 길’이란 뜻입니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지요.

전주 도심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다가공원, 공원 한편에 ‘가람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요, ‘시름’이란 시가 새겨져 있네요. 이 아름다운 공원이 일제강점기 신사 터였었나니 뭔가 씁쓸한 기운이 밀려오네요. ‘시름’ 가득한 마음 담아 ‘시름’이란 시를 한 번 음미해 봅니다.


‘시름’ / 이병기

그대로 괴로운 숨지고 이어 가랴 하니

좁은 가슴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 불어온다.

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 든다

찬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양사재

가람 선생의 마음 착잡한 ‘시름’ 떨구어 버리고 선생의 집필실이었다는 양사재를 찾았습니다. 이 고택의 ‘가람다실(嘉藍茶室)’은 가람 선생이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었다 하네요.

책 읽는 소리 들리는 듯, 오월로 가득 핀 양사재 툇마루에 고즈넉이 앉아 봅니다. 밤이면 별빛 쏟아질 듯한 하룻밤 푸른 낭만을 상상하면서, 햇살 널린 마당을 내다보는 운치가 그만입니다.


가람의 그림자,

여산휴게소와 여산초등학교

고속도로 호남의 관문, 여산휴게소입니다. 방문객들에게 잠시 지친 몸과 마음의 휴식처로서의 시심을 기다리는 여산휴게소, 익산 여산은 가람의 고향이죠.

나그네의 시심을 노래한 듯, 가람의 마음이 담긴 시 한 편,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떠올리게 하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를 음미합니다. 난초를 특별히 사랑한 난초 시인이기도 하죠.

‘여산초등학교’를 재직한 인연으로 ‘학교 교가’를 작사했다고 했지요? 오월의 햇살 내린 교정에서 그의 작품인 교가가 적힌 시비 앞에 서 봅니다. 저절로 흥얼거리며 시작된 민중의 노래인 별, 그의 노랫말 시조인 ’별‘의 시비도 이 교정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가람문학관이 있는 가람이 나고 자란 생가로 쓔웅~~


가람문학관과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의 생가

넓은 주차장 위로 가람 문학관과 이병기 생가입니다. ’재주와 지식을 감추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뜻의 수우재(守愚齋), 선생이 거했던 방이었다고 하죠. 선생의 소탈하고 검소한 심성이 느껴지는 문구입니다. 그가 시의 소재로 즐겨 썼다는 ‘난초’의 대표작, 학창 시절 암송했던 기억을 흥얼이며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난초’ / 이병기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이병기의 시조 ‘난초’ 중>


벽에 빛바랜 사진 한 장에 가는 눈길. 녹슨 문고리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향기 배인 정겨운 아궁이, 뒤란 빼곡한 댓잎 사이로 쨍쨍한 햇살 소리 바스락댔습니다.

밖으로 나와 묘지의 팻말을 따라 올라가 봅니다.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이라는 수식어가 느껴집니다. 국립묘지 안장을 마다하고 비석 하나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며 생가 뒷산에 소롯이 잠들었다고 하죠. 그 흔적 앞에 잠시 묵념하듯 서 있었습니다.

다시 내려와, 생가 너머 가람문학관으로 향했습니다. 가람문학관은 선생의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가람 이병기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7년 설립되었다고 하죠. 전시된 문학작품과 자료 및 동영상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국문학 정립과 한글 수호, 후학 양성을 위한 노력, 가람의 생애를 보고 듣는 동안 와~~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해방 후에 서울대학교, 전북대학교 교수로 재직합니다. 일제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이 살기 위해 친일 문학으로 전향했지만, 옥살이를 하면서도 친일적인 글을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았던 가람 이병기 선생, 그의 첫 시조집인 ‘가람 시조집(1939)’은 고전으로 손꼽힙니다. 그는 민족운동가요,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습니다.

거동이 불편함을 이끌고 편안히 쉴 곳,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우리 정신을 짓밟는 일제의 강압에도 결코 죽지 않은 민초의 꽃인 냉이꽃, 난초를 사랑합니다. 마지막까지 제자복, 난초복, 술복, 三福을 타고나셨다던 일화는 유명이지요. 또한 50여 년을 한결같이 쓰셨다는 그의 일기도 유명합니다. 가족과 나라, 학문에 대한 사랑이 주를 이룬다는.

한글 시조의 선구자로서 그가 생전에 남긴 여러 시조와 일기 등을 정리한 '가람 이병기 전집'이 올해(2025년), 11년 만에 완간됐다고 해요. 한글을 지킨 독립 유공자요, 평생 후학양성의 길을 걸어온 가람 선생, 일제의 한글 말살 투지에 굴하지 않고 우리글의 주체성을 형성해 완성된 선생의 저서, 이 출간을 계기로 그 얼과 혼을 기억하게 된 것은 뜻깊은 일입니다.


가람 선생을 취재하며

향기로운 꽃을 찾는 봄입니다. 볼거리 많은 여행도 좋지만,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한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행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가람 선생을 찾아 떠난 여행, 무엇보다 올곧은 독립정신과 ‘한글수호자’라는 선생에 대한 울림은, 한글을 사랑하는 기자의 마음을 진하게 흔들었습니다. 덕분에 단단한 여행이 된 이 봄. 모두가 화창한 봄이면 좋겠습니다.


📍관람 안내

[관람시간]

3월 - 10월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11월 - 2월 화요일 - 일요일

(오전 9시-오후 5시)

[휴 관 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날.

시장이 필요하여 인정한 날.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다음 날)

[관 람 료]

무료

[주 소]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64-8



글, 사진 = 전예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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