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시간 전
함안 가봐야할 곳 조선시대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이 지냈던 어계고택
제13기 함안군 블로그 기자 윤은정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592번지 내 위치한
어계고택은 조선 전기의 문신
어계 조려(1420~1489)선생이 태어난 집입니다.
네비로 검색해서 들어가다 보면
길이 좁다?!라는 생각이 들텐데요.
그냥 쭉 가시면 어계고택 근처에는
넓은 주차장이 나온답니다.
근처에 밭 매시는 어르신의 강아지가
사람이 오는 것이 반가운지 따라오더라구요.
태학관에서 수학하던 어계 조려 선생은
단종 3년(1453)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와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호랑이를 타고 강을 건넌 전설
노산군(단종이 강등됐을 때의 이름)을 영월에 안치하고
청령포 나루를 누구도 마음대로 건널 수 없게
조치했다. 영월과 함안은 거리가 오백여 리나
되는데도 어계 조려 선생은 한 달에 세 번씩이나
찾아가서 문안을 드렸으며
도중에 원호의 집에 숙했고
매일 밤 성수 만세를 하늘에 기도했다.
그런데 순흥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금성대군이 또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 나자,
세조는 정축년(1457년) 10월 21일 금성대군과
단종의 장인 송현수를 죽이고
10월 24일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승하소식을 들은 선생은 밤낮을 달려
청령포를 당도하니 한밤중이었으며
나룻배도 없었다.
이리저리 헤매어 찾았으나 건널 수 있는 방안이 없어
가슴은 답답한데 날은 점점 밝아져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다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강을 헤어쳐서 가려 하던 차에
홀연히 등짐을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아
돌아보니 크나큰 호랑이였다.
선생이 말하길
"내 천리 길 분상에 이 강을 못 건너고 있노라.
이 강을 건너서 왕의 옥체를 염습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한다면
장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거늘
너는 어쩌자고 나를 당기는고?"
하니, 호랑이는 머리를 숙이고
창포 위에 엎드렸다.
그 뜻을 알아챈 선생이 즉시 그 등에 업혀
강을 건너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가보니
다만 두 사람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통곡 사배하고 시신의 수렴을 마치고
문을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가
다시 강을 건네 주었다.
<대동기문>,<강원도지>,<영월읍지> 등에 실린
호배도강전설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단종을 향한 충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또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어계고택 주차장이 커다랗게 적혀 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아셨으면 하는 마음에 적어 놓았겠지요.
금은 조열
어계 조려선생은 공민왕 때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고
처음 평광에 살다가 뒤에 원북으로 옮겨 살았다.
거문고와 서화,시에 능했는데
달밤에 거문고를 타면 소리가 몇 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공민왕 때의 어느 날 밤에 선생과 성만용,
변빈,정몽주,김성목,이색,홍재 등이
변빈의 집에 모여 술잔을 들고
회포를 논할 때 이색이 말하기를
"은나라에 삼안이 있어 비간은 죽었고
미자는 떠났으며 기자는 종이 되어
각자 뜻에 따라 행했다"고 말하니
모두가 좋다고 했다.
공양왕 3년(1391) 이성계의 병권을 빼앗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축출당해 돌아와 은거했다.
후에 홍재는 두심동에 은거했는데
선생은 산인면 고려동에 은거한
이오와 함께 두심동을 오가며 세상을 슬퍼했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한양궁 낙성연을 열면서
태조가 선생을 초청해
거문고를 타 달라고 부탁했다.
선생이 "전에 공민왕이 여러 번 부탁할 때도
타지 않은 것은 이미 있는 사실인데
지금 태조의 청을 들어 준다면
나중에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공민왕을 뵈리오"하면서 거절했다.
정종 1년(1399) 왕이 태조의 어진(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예전 공민왕 어진을 그려 달라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시 거절하자
왕이 노해서 옥에 가두었다.
태조가 이 사실을 듣고 석방하게 했다.
모은 이오, 만은 홍제,단구 김후와 함께
넷이 한 구절씩 지은 시가 전한다.
어계 조려 선생의 생전 일화들이 적혀 있습니다.
어계고택은 현재 대문채와 원북재라 불리는
재실 및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후손들이 재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 건물인 원북재는 정면4칸, 측면2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돼 있으며,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검약하게 지어졌습니다.
부엌은 두지 않고 대청과 침실을 둔 것으로 보아
살림집이라기보다 재실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어요.
옆에는 새롭게 지어진 공간이 있었습니다.
건물 뒤편의 삼문을 들어서면
비교적 크고 화려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에서는 음력 3월 초정일에
조려 선생과 부인에게 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곳에는 국왕의 하사품인 향로와
그가 사용하던 죽장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조려 선생이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은
구일등고시가 유명합니다.
조선시대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이 지냈던
함안 어계고택에는 수령이 500년 된 보호수가 있어요.
커다란 나무가 어계고택을 보호하는 거 같았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어계고택
함안여행 시 역사를 찾아 한번 방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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