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전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9코스ㅣ삼각주가 만든 공간, 서낙동강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다
강과 바다, 물길 따라 흩어져 있는
부산 역사 문화유산
그 내력과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온라인 답사기
「부산 물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아홉 번째 코스로
"삼각주가 만든 공간, 서낙동강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9 코스 |
대저수문 ▶ 대저수리조합 터 ▶ 양덕운 가옥 ▶ 낙동강칠백리 식당 ▶ 신평마을 비행기 격납고 ▶ 죽도왜성 ▶ 녹산수문 김상휴·홍재철 영세불망비 명지염전 터 ▶ 낙동강하구 에코센터 |
코스 9ㅣ삼각주가 만든 공간,
서낙동강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보다
강서 지역은 낙동강 하구에 형성된 삼각주 지형 위에 있어 다른 곳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행정상의 관할은 부산·양산·김해를 넘나들었고, 경계 또한 수도 없이 다시 그어졌다.
부산이면서도 부산과는 다른 서낙동 강만의 역사와 특색을 찾아 답사여행을 떠나보자.
대저의 유래와
대저수문
대저가 왜 대저일까? |
삼각주의 형성은 하천과 바다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으로 자연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지형이다.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지형은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의 모습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저는 한자로 ‘大渚’라 쓴다. 저(渚)는 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또는 모래섬이라는 뜻의 한자다. 즉 대저는 ‘큰 물가’ 또는 ‘큰 모래섬’이란 뜻이다. 대부분의 삼각주가 그렇듯이 이 지역도 지대가 낮은 범람원이어서 연례적인 홍수 피해지역이었다.
홍수 때면 단일 유로를 유지하던 낙동강이 하구에 이르러 모래섬들 사이사이로 자유롭게 물이 넘쳐흘러 여러 개의 지류로 갈라졌다. 그래서 이 지역 대부분은 오랫동안 갈대가 밭을 이룬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홍수에 의해 운반된 퇴적물은 풍부한 농업생산력을 지녔다.
홍수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비옥한 충적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하나둘 이곳 대저로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대저에 수문을 만든 이유 |
대저 지역을 온전한 평야로 만들려면 본류를 동낙동강으로 하고 서낙동강을 지류로 만드는 것이 유리했다. 또한 강을 완전히 막게 되면 평상시의 농업용수 공급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갑문 형식의 수문을 설치한다면 평소에는 강물이 흐르도록 하고, 홍수로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수문을 닫아 범람을 막을 수 있었다.
수문은 부수적으로 낙동강을 이용하는 배들의 출입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대저수문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새롭게 재탄생한 수문 |
수문 몸통에는 큰 글씨로 ‘대저수문’이라고 적혀있는데 예전엔 ‘대동수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수문 위로는 왕복 6차선 다리가 놓여있고, ‘대저교’라 적힌 동판이 다리 입구에 박혀있다. 이 다리도 예전에는 ‘대동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저수문은 1987년 12월부터 1988년 10월까지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하여 완전히 새롭게 재탄생했다. 준공 당시에는 사람의 힘으로 핸들을 돌려서 수문을 열고 닫는 수동식이어서 조작이 불편하고 개폐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불편함이 많았다. 수문을 재가설하면서 전동식 자동조절장치를 설치하여 상당히 편리해졌다.
이때 수문 위에 놓인 대저교도 총연장 40m, 폭 20m 규모의 왕복 6차선 다리로 재가설하였다.
보존이냐 철거냐
대저수리조합
수리사업? 수리조합? 무얼 고친다는 건가?? |
수리(水利)사업은 ‘수리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수리조합이란 농지에 대한 관개용 저수지나 제방의 축조·관리, 토지개량사업, 수해 예방사업 등을 목적으로 그 지역의 토지나 가옥의 소유자들이 모여서 조직한 법인체를 말한다.
1908년 옥구서부수리조합(전북 군산)의 설립을 시작으로 주로 일본인들의 토지 침탈이 심했던 지역에서 대규모 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 1916년 설립된 대저수리조합도 그중 하나였다. 이후 수리조합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1920년대 말이 되면 조합 수가 196개로 크게 늘어났다. 수리조합은 해방 이후 농지개량조합을 거쳐 지금의 공기업인 한국농어촌공사가 되었다.
한국농어촌공사의 설립일이 1908년 12월 8일이라고 되어있다. 이날은 옥구서부수리조합이 설립된 날이다.
대저수리조합 건물과 비석들 |
대저수리조합 마당에는 커다란 비석이 있다. 사람 눈높이 정도의 3단 기단 위에 아무 장식도 없는 2m짜리 직사각형 화강암 비석이 놓여 있는데, 전면에 세로로 '대저수리공사기념비'라고 크게 적혀 있다. 대저수리조합 창립과 이 지역 수리공사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1917년에 경남도지사 명의로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 맞은편에 또 다른 비석이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22일 오전에 김해비행장에서 이륙하던 미군 제트비행기가 이곳 수리조합 건물 지붕 위로 추락하여 근무 중이던 직원 일곱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비석은 그때 사망한 일곱 명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석 몸돌에 ‘대저수리조합순직직원위령비’라적혀 있고, 받침돌에 사망자의 직위와 이름이 적혀 있다.
대저 지역의 낙후와 활성화 프로젝트 |
강서 지역의 개발 바람과 낙동강 생태공원이 조성되면서 드넓던 농경지는 거대한 공원과 건축물들로 변모하고, 농사짓던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제는 빈 점포만 늘어가고 오가는 사람의 발길도 확 줄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신장로 활성화 프로젝트>가 2013년부터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대저수리조합 건물은 ‘강서도시재생열린지원센터’로 탈바꿈하여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해오고 있다.
대저의 근대건조물,
적산가옥(일식가옥)
대저에 적산가옥이 많은 까닭은? |
적산가옥은 ‘적의 재산인 집’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해방 이후 한반도에 남겨진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일컫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군정법령 제2호 「패전국 정부 등의 재산권 행사 등의 금지」에 의거하여 패전국 일본의 재산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군정법령 제33호 「조선 내 소재 일본인 재산 취득권에 관한 건」에서는 일본인 재산은 조선군정청이 취득하고 조선군정청이 그 재산 전부를 소유하는 것으로 되었다.
대저에는 지금도 일본인들이 당시에 짓고 살았던 가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대저 일대가 개발의 광풍에서 한발 비켜난 낙후된 지역이라 오히려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적산가옥-귀속재산-일식가옥-근대건조물 |
대저1동 신촌·번덕·당리마을 일대에는 2015년 기준 스물아홉 채의 적산가옥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매년 하나둘씩 헐려 나가서 지금은 정확히 몇 채가 남아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중에서도 낙동강칠백리 식당을 비롯하여 양덕운 가옥, 문용대 가옥, 이기문 가옥, 이동철 가옥 등은 지어질 당시의 본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보존상태 또한 꽤 좋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미 불하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적산이 정부에 이양되었다. 이때 미군정으로부터 넘겨받은 적산을 귀속재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요즘은 적산가옥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고 ‘일식가옥(일본식 가옥)’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부산시는 부산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부산광역시 근대건조물 보호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여 2012년에 부산대 인문관, 동아대 석당기념관, 하얄리아부대 장교클럽, 초량 백제병원, 낙동강칠백리 식당, 양덕운가옥 등 여섯 개의 ‘부산근대건조물’을 지정하였다.
사라져 가는 대저 일식가옥들 |
1930년에 지어진 양덕운 가옥은 대저에서 가장 큰 일식가옥이며 보존상태 또한 원형에 가깝게 아주 좋다. 대저에서 가장 큰 일식가옥이라는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이쁜 정원이 있으며, 비늘판 벽에 겹처마와 눈썹지붕을 한 전형적인 일본 주택의 외형을 가지고 있다.
2층 구조로 된 눈썹지붕은 일본에서도 눈이 많이 내리는 북부의 양식이다. 양덕운 가옥은 개인 주택이기 때문에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1926년에 주택으로 지어진 이 집은 1990년대 들어 ‘낙동강칠백리’라는 이름의 음식점으로 사용되었다. 규모나 외형이 양덕운 가옥과 비슷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해서 근대건조물로 함께 지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식당이 문을 닫아 빈집 상태로 방치되고 있어서 문제가 심각하다. 근대건조물 명패라도 없었으면 폐가나 다름없다.
신평마을 비행기 격납고
그리고 죽도왜성
비행장 옆 신평마을의 유래 |
일제시대에는 평소마을이라 했다. 그런데 일제가 1940년 이곳에 해군 함재기 조종사 양성을 위한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타지로 떠나야만 했다. 평소마을을 떠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해방이 되면서 강제로 이주당하여 뿔뿔이 흩어졌던 주민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신흥마을이 생겼지만 일본군이 쓰던 비행장을 계속해서 한 국군이 사용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급기야 국방부는 1961년에 공군비행장을 확장하기 위해 두 마을을 하나로 합쳐버리고 농사짓던 많은 땅을 비행장 부지에 편입시켰다. 이때 신흥마을과 평소마을이 합쳐져서 지금의 신평(新平)마을이 된 것이다.
이 집이 비행기 격납고였다니!! |
김해국제공항의 서북쪽, 공군 제5전술비행단의 담장과 이웃한 신평마을에는 몹시 특이한 볼거리가 있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에 집들이 듬성듬성 있고, 집보다는 비닐하우스가 훨씬 많다. 비닐하우스 위에는 하나같이 초록색 천막이 덧대어져 있다. 아마도 군사시설 인근이다 보니 위장막의 역할을 하는게 아닌지 모르겠다.
밭 한가운데 파란색 아치(돔)형 낮은 지붕을 한 독특한 건축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정체는 ‘비행기 격납고’이다. 일제가 대저에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만들었던 훈련용 비행기(‘아카돔보’라 불리던 잠자리 비행기) 격납고들이 이 마을에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비행기 격납고를 개조해서 ‘굴집’이라 부르며 가정집과 창고 등으로 사용했다.
격납고 굴집 둘러보기 |
격납고의 측면은 아치형 지붕이 2단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비행기 몸통이 들어가는 앞의 지붕은 크고 넓게 만들고, 꼬리 부분이 들어가는 뒷쪽의 지붕은 작고 낮게 만든 것이다. 반원 형태의 정면은 마치 군대의 옛날 막사처럼 생겼다.
크기는 대략 정면 20m, 측면 12m, 높이 4m 정도이며, 양옆으로 낮고 길게 벌어져 있어서 상당히 안정감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가정집이기 때문에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축사 바로 뒤에 격납고가 있었다. 내부에는 나무 울타리가 쳐진 걸 보니 얼마 전까지도 이 안에 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미군 B-29 폭격기의 폭격에 대비해 무려 60~70cm 두께의 콘크리트 외벽을 두른격납고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워낙 튼튼하게 지어져서 마치 자연 동굴 같
은데, 마을 사람들이 굴집이라 부르는 이유를 내부를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격납고는 왕릉의 봉분처럼 흙을 다져가며 크게 쌓아 올린 뒤 그 위에 갈대로 만든 돗자리를 깔고 굵은 자갈을 섞은 콘크리트를 부은 후, 콘크리
트가 완전히 굳으면 속에 채운 거푸집 역할을 한 흙을 파내어 완성했다.
죽도왜성과 조선 도공 |
원래 섬이었던 이 산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서 죽도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성을 죽도왜성이라 하였다.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가 낙동강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1593년 7월에 쌓은 죽도왜성은 구포왜성의 본성이다.
나베시마는 임진왜란 때 100명이 넘는 조선 도공(도자기 기술자)을 잡아간 것으로 악명이 높다. 죽도왜성은 서낙동강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어서 김해 대동에서 명지에 이르는 뱃길의 동향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고, 주변으로 높은 봉우리가 없어 김해평야 일대를 사방으로 조망할 수가 있다.
명지 염전과
녹산수문
명지 일대는 소금밭이었다 |
직장인 샐러리맨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월급날이다. 현대에서 말하는 Salaryman은 옛날 로마시대에 소금(Salt)을 병사들의 월급(Salarium)으로 지급한 데서 유래했다.
대저와 명지는 땅의 쓰임새로나 주민들의 생활과 문화로나 여러모로 달랐다. 대저는 행정상 오랫동안 구포와 함께 양산에 속했고, 주민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다. 반면 김해에 속했던 명지는 바다와 맞닿아있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염전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일찍부터 소금을 생산하는 일을 생업으로 하고 살았다.
명지 공염장과 자염 |
명지 일대의 염전이 국가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영조 때였다. 공연장이란 국가에서 소금 생산과 판매를 직영해서 그 이윤을 국가재정에 이용한 제도를 말한다. 공염제 시행에 반론이 거셌으나 영조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박문수가 명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하여 명지에 공염장을 설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다만 재난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므로 1년 동안만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하였다. 명지도 안에 ‘자염최성’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자염이 가장 번성한 곳이라는 뜻으로, 명지에서 자염을 가장 많이 생산한다는 의미이다.
녹산수문 건설과 명지 염전의 쇠락 |
1876년 강화도조약에 따른 개항은 명지 염전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천일염이 들어오면서 1907년 무렵부터는 서해안 염전에서 천일염 생산이 크게 증가하였고, 자염도 땔감 대신 점차 석탄을 들여와서 소금을 생산하게 되었다.
강 상부에 수문을 건설해도 명지·녹산 방면으로 유입되는 짠 바닷물을 막지 못하면 서낙동강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바닷물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녹산수문을 대저수문과 동시에 건설해야만 했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서해안 염전의 천일염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자염은 점차 사라져 갔다. 그럼에도 1960년대까지 명지 염전은 명맥을 유지하며 소금을 생산했다.
염전은 어디 가고 비석만 덩그러니 남아 |
명지는 지금 오션시티, 에코델타시티, 국제신도시 등의 조성으로 섬 전체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고 있다. 이곳이 영남 최대의 염전 지역이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연상되지 않는다. 옛 명지파출소(명지1동 행정복지센터 옆) 입구의 커다란 나무 앞에 오래된 비석 둘이 서 있다.
‘순상국 김공휘상휴 영세불망비’와 ‘순상국 홍공재철 영세불망비’이다. 1824년과 1841년에 각각 세운 두 비석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김상휴와 홍재철이 명지 염민들이 소금 생산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선정을 베푼 공덕을 기리는 것이다.
을숙도와
낙동강하구에코센터
을숙과 일웅이 하나가 된 섬 |
을숙도라는 이름은 1961년 지명 정비 때 비로소 정해지게 되었다. 을숙도 바로 위에는 샛강을 사이에 두고 일웅도가 있었다. 요산 김정한 선
생이 1966년에 발표한 『모래톱 이야기』의 주 배경이 되는 ‘조마이섬’이 일웅도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일웅이가 을숙이와 살림을 차렸는지 낙동강하굿둑이 건설되면서 을숙도와 합쳐져 지금은 하나의 섬이 되었다.
‘새가 많이 살고 물이 맑은 섬’이라 하여 을숙도란 이름이 지어졌다.
부산시 분뇨 처리의 역사 |
일제시대 부산부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자 부민들이 배설하는 분뇨도 비례해서 넘쳐났다. 처음엔 남부민동 앞바다에 버렸지만 송도에 해수욕장과 휴양지가 조성된 이후 새롭게 분뇨를 처리할 시설이 필요해졌다.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난항을 겪다가 괴정과 하단이 낙점되었다.
1937년 부산부는 분뇨처리장 등의 건설 예산 38만엔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여 승인을 받아 이듬해에 시설 공사를 진행해서 1939년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그래서 이 지역에선 낙동강이 아닌 ‘낙똥강’이라 불렀다.
생태계 복원, 에코센터 건립 |
개발과 성장이 우선이던 20세기가 저물어가면서 을숙도의 과거에 대해 성찰하고 훼손된 생태계의 복원을 위한 각계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부산시에서는 2000년부터 친환경적 생태계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2012년 12월까지 사직야구장의 37.8배에 해당하는 총 1,907천㎡ 규모의 을숙도 생태복원을 완료하였다.
낙동강하굿둑 남단이 모두 생태공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낙동강하구에코센터’는 2007년 6월에 건립되었다. 이름의 에코는 당연히
생태, 환경, 자연 등을 의미하는 Eco이다.
강변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메모리얼파크’가 나온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공원처럼 보이지만 이곳이 바로 쓰레기 매립장이 있던 곳이다. 주차장 한쪽 모서리에 콘크리트 벽처럼 생긴 특별한 구조물이 있는데, 생태복원사업을 하면서 쓰레기 매립장의 기억을 상기하기 위해 콘크리트 일부를 철거하지 않고 남겨두어 메모리얼파크라 이름 지은 것이다.
2012년 6월 건립된 ‘낙동강하구탐방체험장’이다. 이 건물은 밖에서 보면 정체를 알기 어렵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예전 분뇨처리장을 리모델링 한 곳이기 때문이다. 복원의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 분뇨처리시설의 일부 구조물을 멋들어진 정원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이 독특한 정원은 2013년도 부산시 아름다운 정원에 선정되기도 했다. 정원을 둘러보면서 여기가 과거 똥들이 가득 찼던 곳이라 생각하니 머릿속에서 구린내가 났다. 실제로는 냄새가 나지 않으니 부담 갖지 말고 들어가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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